2. 작업 내용 및 표현 방식
작업은 흙과 유약이라는 두 재료 사이의 경계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흙은 구조를 만들고, 유약은 표면을 장식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이 두 재료가 서로 다른 단계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지만, 흙과 유약은 재료학적으로 유사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난는 이러한 유사성과 차이 사이에서, 흙과 유약이 어떻게 관계 맺고, 섞이고, 변형 되는지, 즉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두 존재가 하나의 장 안에서 공존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이는 생과 멸, 자아와 타자, 생성과 해체 등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원적 구조가 실상은 서로를 통해 존재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구조임을 인식하는 유무상생(有無相生)³의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작업 과정에서 재료에 관한 실험으로 구체화된다. 앞서 말했듯, 도자 공예에서 흙과 유약은 각기 다른 단계로 기능하지만, 나는 이 둘의 공통 요소인 융제(flux)⁴를 중심으로 실험을 동반한 작업을 한다. 융제는 특정 온도에서 재료를 녹이는 역할을 하며, 나는 흙과 유약 모두에 같은 융제를 비율을 다르게 섞어, 번조(燔造)⁵ 과정에서 무너지고, 흘러내리고, 눌리는 등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이러한 조형적 실험은 의도와 우연 사이를 드러낸다. 나는 작업을 할 때 완성된 특정 형태를 목표로 하지 않으며, 형태가 스스로 변화의 한 순간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겪는 ‘◯’의 집합체가 <Tantra> 시리즈다. <Tantra>는 조형 언어 ‘◯’의 반복적 구조와, 물리적 변화의 역동성이 함께 표현된 작업이다. 작업 방법은 이장주입기법(Slip-casting)을 기반으로 반복적인 행위를 계속하지만, 나는 매번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음을 경험한다. 번조 과정에서의 높은 온도와 중력은 흙과 유약이 유리질화⁶될 때 변화를 증폭시키기 때문에 반복적인 작업 과정 속에서도 차이가 생겨난다. 나는 이 과정을 ‘변화의 구조화’라고 표현한다. 작업은 <표 1>과 같이 1차 번조 – 반복, 2차 번조 – 변화와 수용, 3차 번조 – 수용과 활용의 과정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표1> 작품의 단계별 번조(燔造) 과정
이러한 구조 속에서 조형물은 점차 무너지고, 눌리며 스스로 변화하고, 나는 그 변화 이후의 형상과 마주하며, 새로운 관점으로 조형의 방향을 다시 구성한다. 속담을 빌리자면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속담은 “변화와 수용” 과정을 통해 무너진 공든 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무너진 공든 탑을 다시 바라보며 “수용과 활용” 단계를 진행한다. “변화와 수용” 단계에서 바닥이었던 부분은 더 이상 바닥이 아니게 되고, “수용과 활용” 단계를 거쳐 조형물은 스스로 새로운 중력을 부여받는다. 나는 무너짐을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구조적 이완으로 바라보며, 그 안에서 새로운 관점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하나의 과정은 다음을 위한 틈이 되며, 이러한 순환은 내 작업에서의 시간성, 즉 becoming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나는 반복과 변화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존재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반복은 변화의 조건이며, 변화는 반복 속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구조는 동양철학의 순환적 세계관, 생성과 소멸의 상호작용을 반영하며, 조형 언어 안에 관계적 시간, 비(非)선형적 과정, 그리고 존재의 흐름이 시각적으로 구현되기를 기대한다. <Tantra>는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특정한 결과를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결과보다 과정에, 통제보다 유기적 흐름에 의미를 두는 사유의 방식으로써 의미가 있다.
3. 이론적 배경 및 관심사
나의 작업은 동양철학을 핵심 이론적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변화, 순환, 상호의존성에 대한 관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양철학, 특히 불교의 연기설(緣起說)과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개념, 도교의 순환사상에서 비롯된 철학적 사유는 작업의 근본적인 흐름을 형성한다. 이러한 동양적 사유는 시간의 비(非)선형적 흐름, 유무의 상생[有無相生], 그리고 존재의 상호의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
작업은 또한 서양철학의 일부 개념과 교차점이 있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론과 니체의 영겁회귀론은 내가 작업에서 다루는 순환적 개념과 연결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존재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성질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의 영겁회귀론은 모든 사건이 반복되어 다시 되돌아온다는 사유로, 변화와 순환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접근을 제시한다. 이러한 철학의 영향을 통해 나는 ‘과정으로서의 존재’와 ‘변화하는 존재’를 기반으로 작업에 대해 탐구한다.
동양철학에서의 순환적 사고는 특히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⁷에서 강조되는 개념이다. ‘변화’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주역에서, 모든 것은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 철학에서 만물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변화과정 그 자체가 세계의 본질임을 말합니다. ‘천지(天地)’라는 개념 속에서 하늘과 땅의 상호작용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는 작업에서 추구하는 상호의존성과 순환적 사고의 철학적 근거가 된다. 이와 같은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작품은 단순히 일회성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지속적인 순환과 변화를 경험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내 작업은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아우르는 철학적 전제 속에서, 존재와 변화, 관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나에게 작업은 결과물이 아닌, 그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가능성이며, 그 속에서 지속적인 흐름과 관계를 탐구하고자 한다.